
■햇돼지 잡던 광부들
저탄장으로 가는 운반 트럭이 탄가루를 날려 탄광촌 전체가 새카맸다. 비가 오면 시가지와 사택길은 죽탄 진창으로 변해, 장화 없이는 걷기 어려웠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광부들은 배꼽에 낀 탄가루만으로도 한겨울을 나기 충분하다고 농담하곤 했다. ‘진부 기생 배꼽엔 톱밥이, 마차 기생 배꼽엔 탄가루가 있다’는 말은 지역의 산업특성을 반영한 유머였다. 탄광에서 사용하는 갱도 지주목은 평창군 진부지역에서 많이 벌목되었으며, 영월군 마차리에 큰 탄광이 들어선 것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 남편 공휴 나나 마나’라는 말은 안 써본 광부 아내가 없을 정도로 유행했다. 이는 공휴일에 동료들과 술만 마시거나, 고된 노동에 지쳐 잠만 자는 남편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 말이었다. 석탄 증산에 쫓겨 공휴가 드물던 현실이 빚은 결과이기도 했다.
탄광현장에서는 경력자를 묵은돼지, 갓 입사한 사람은 ‘햇돼지’라고 불렀다. 햇돼지가 작업장에 배치되면 선배들은 ‘햇돼지 잡는다’며 여러 골탕을 먹이며 놀렸다. 첫 월급을 타면 신고식을 하는데, 이날도 ‘햇돼지 잡는 날’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 탄광사고 사망 보상금이 3천만 원이던 시절, ‘3천만 원짜리 검은 돼지를 키운다’는 서글픈 농담이 유행했는데, 이는 잦은 사고가 일상이던 탄광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강아지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니던 호황기
1960~1970년대, 노다지를 꿈꾸며 탄광 개발에 나선 이들이 탄광촌으로 몰려들었다. ‘광부 한 명에 반짝 구두가 다섯 켤레’라고 했으니, 한 명을 고용하는 갱구만 있어도 5명이 잘 살 정도로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강아지도 만 원짜리 물고 다녔다는 표현도 탄광촌의 번성기를 상징하고 있다. 태백의 대구관이나 영월의 수원관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요정이 즐비한 탄광촌 밤 풍경은 대도시 못잖았다. 팁을 줄 때 선풍기를 켜놓고 마대 자루의 돈을 한 움큼씩 뿌렸다는 일화는 요정의 불을 더 휘황찬란하게 했다.
우리나라 마지막 탄광이 될 삼척시 경동상덕광업소 전신인 흥국탄광을 1973년까지 운영하던 채현국 사장은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10위 안에 든 거부였다. 그 당시 30대 젊은 나이에 벤츠를 타고 종로를 드나들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태백의 ‘황지시장 좌판 하나면 명동 땅도 산다’라는 말이나, 삼척의 ‘도계는 봄날이다’, 정선의 ‘대한민국 택시 최고 황금노선은 사북시내-지장산사택’이라는 말들은 모두 탄광촌 번영기를 보여주는 유행어들이다. 광업소 신분증을 인감증이라고 부르는데, ‘인감증만 뒷주머니에 차면 시집오겠다는 처녀가 줄을 섰다’는 말도 석탄산업 절정기의 유행어다.

■햇빛만 보면 녹는 탄광의 돈
탄광촌에는 돈이 흔했지만, 광부들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광부는 두 겹 하늘, 광부 아내는 세 겹 하늘을 이고 산다’는 말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준다. 광부에게 지하 탄광의 천장과 바깥 하늘이 두 개의 하늘이라면, 그들의 아내는 ‘한숨’이라는 하늘이 하나 더 있었다. 굴 속으로 들어간 남편의 안전에 대한 걱정과 생계에 대한 걱정이 뿜어낸 한숨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온 탄광촌이라 외상이 성행했는데, 이 때문에 물가가 높아지는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손님과 가게가 각각 장부를 지니고 있어 ‘맞장부’라고 불리는 외상 거래가 일상적이었다. 어린아이들도 외상 거래를 흔하게 할 정도였다. 한 연구에서는 맞장부가 광부들의 경제적 자립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황지 생겨나고 외상 생겨난 것이 아니라, 외상 생겨나고 황지 생겨났다’는 태백사람들의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딱 3년만 하고 떠나자는 게 광부들의 최고 거짓말’이란 유행어는 탄광촌에 주저앉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다. 빚과 비싼 이자의 악순환, 발달한 유흥 문화, 부상이 잦은 육체노동 등이 저축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밤낮없이 굴을 파도 생기는 게 없다’는 광부들의 자조적 표현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굴 속에서 캐는 돈은 힘이 없다거나, 탄광 돈은 햇빛만 보면 녹는다고 했다. 그래서 탄광촌을 떠나갈 땐 굴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금기까지 생겼다. 태백을 떠나 경상도 지역으로 이사 나갈 때는 지름길인 동점 구문소를 지나가지 않았다. 탄광에서 번 돈이 굴 밖을 나가서 녹을까 걱정하여 구문소 터널을 피한 것이다. 이사비용을 더 지급하면서까지 연화산이나 통리지역으로 우회하였다.
전국에서 한 개 읍면을 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하여 탄광촌을 팔도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온 이들이 유행어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고된 현실을 버텨내는 해학과 생존의 지혜를 만들었다. 탄광촌 주민의 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낸 탄광촌 유행어들은 한국 산업화를 이끈 사람들의 증언이자, 우리 근현대사의 귀중한 민속어 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정연수
1991년 탄전문화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탄광이 빚은 삶들을 문화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전념했다. 2020년부터는 석탄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활동과 석탄산업전사들을 예우하는 방안 모색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탄광시전집’, ‘여기가 막장이다’, ‘탄광촌 풍속 이야기’, ‘탄광촌 도계의 산업문화사’, ‘강원도 석탄산업유산 현황과 세계유산화 방안’, ‘노보리와 동발: 탄광민속문화 보고서’, ‘한국 탄광사: 광부의 절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