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임신을 하게 되어 일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임신 및 출산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되었다.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임신 초기에는 아기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지 여러 가지가 궁금했지만, 특히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는 아기의 성별이었다. 그 과정에서 외국에서 임신 중 아기의 성별을 가족과 친지들에게 밝히는 문화인 젠더 리빌 파티(Gender Reveal Party)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SNS를 통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임신 중 아기의 성별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공유하는 문화가 비교적 최근에서야 유행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어 보인다. 1987년 11월 28일 개정된 의료법은 제19조의2 제2항에 “의료인은 태아 또는 임부에 대한 진찰이나 검사를 통하여 알게 된 태아의 성별을 임부 본인, 그 가족 기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을 도입하여 임신 전 기간 동안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없도록 금지하였고, 이후 2009년 12월 31일 개정된 의료법 제20조 제2항은 “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나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면서 알게 된 태아의 성을 임부, 임부의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임신 32주 전까지는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의료법의 태아 성별 고지 금지 조항이 도입된 배경은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태아의 성별을 확인한 후 성별에 따라 낙태를 하는 일이 있었고 성비 불균형 문제까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의 문화는 변화하게 되었다. 특정 시기까지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되었고, 약 10년간 위 조항의 위반을 이유로 처벌된 사례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태아의 성별을 이유로 낙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태아 성별 고지 금지 조항에 대해 임부와 임부의 가족인 변호사들이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청구를 하였고, 헌법재판소는 2024년 2월 28일 위 조항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하였다. 이로써 태아 성별 고지 금지 조항은 도입된 지 37년 만에 효력을 잃게 되었고, 2024년 12월 20일 법 개정으로 완전히 삭제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태아 성별 고지 금지 조항의 도입과 삭제 과정을 보면, 사회의 변화가 법원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시로 든 사례 외에도 우리 사회의 변화가 느껴지는 새로운 법이 제정, 개정되고 새로운 판례가 등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재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사회의 변화를 놓치고 있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은 ”법관은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읽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사건에 대한 그때그때의 여론이나 분위기보다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법관으로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건 자체를 충실히 검토해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의 변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