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법정칼럼]법은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

최윤경 춘천지방법원 판사

◇최윤경 춘천지방법원 판사

법정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강한 감정을 안고 있다. 억울함을 풀고 싶다는 마음, 분노를 이해받고 싶다는 기대, 혹은 사건을 겪으며 쌓인 감정을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다는 바람. 재판을 진행하다 보면 이러한 감정이 단순한 부수 요소가 아니라, 분쟁의 형성과 지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법률적 쟁점보다 감정의 응어리가 사건을 법정으로 이끌어 온 직접적인 동기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재판에서 ‘경청’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사자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은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전제다. 감정이 섞인 진술 속에는 사실관계의 맥락과 쟁점의 실마리가 함께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디에서 갈등이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기록만으로 판단에 이르기 어렵다. 경청은 판단 이전에 요구되는 법관의 기본적인 태도이자, 쟁점을 정제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다만 경청은 공감이나 동의와는 구별된다. 법관이 감정을 충분히 듣는 이유는 감정에 따라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법적으로 다룰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기 위해서다. 재판의 과정에서 감정은 사실과 주장으로 분해되고, 그중 법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만이 판단의 대상이 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가 느끼는 거리감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법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규범의 언어로 ‘번역’하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리감은 개인의 태도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문제다. 법은 개별 사건을 넘어 일반화가 가능한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규범의 체계다. 만약 감정의 강도나 표현 방식이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유사한 사건에서도 결과가 쉽게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법이 지향하는 예측 가능성이나 형평성이라는 가치와 충돌한다. 감정은 진실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공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

또한 감정은 본질적으로 변동적이다. 당사자의 기질과 성향, 가치관과 경험, 시간의 경과, 주변의 반응,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감정적 평가도 서로 달라진다. 법이 이러한 변화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법은 기준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반응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은 감정을 직접 판단하지 않고, 감정이 발생하게 된 행위와 그 결과를 규범의 언어로 재구성한다. 반성의 태도나 정신적 고통과 같은 요소도 일정한 틀 안에서만 간접적으로 고려될 뿐이다.

원하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당사자는, 법관이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해 주지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이 반드시 당사자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재판의 과정에서 법관은 경청하며 공감하되, 그 판단이 개별 사안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적인 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직업인으로서 법관이 작성한 판결문은 이러한 숙고의 결론만을 간결한 문장으로 드러낼 뿐, 그에 이르기까지 자연인 개인이 느낀 소회나 고민, 망설임과 균형찾기의 과정을 전부 다 쏟아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감정을 충분히 들은 뒤, 그 감정이 판단을 대신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제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감정이 멈추는 지점에서 법이 시작된다는 말은, 그 경계에 서야 하는 법관의 역할과 책임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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