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6·25의 노래 첫 소절로 노래 가사에 북한군 침략에 대한 분노와 비장한 각오가 함축되어 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내고 휴전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원경찰은 치안 유지와 공비 토벌을 하며 전쟁을 하여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애국심을 가지고 용감히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우고 525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강릉경찰서 전대욱 순경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경 강릉 정동진 등명해안초소에서 경계 및 정찰임무 수행 중 북한군 상륙부대를 발견하고 초동 대응을 했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잠시 후 북한군은 새벽 4시를 기해 남침을 강행하였다. 군·경포함 최초의 전사자다. 춘천경찰서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감 등 경찰관 10명과 대한청년단원 1명은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 2사단 병력이 침공을 하여 오자 지서 주위에 구축한 방호진지에서 소총으로 대항하며 북한군 20여명을 사살하고 1시간 동안 교전을 하였으나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적의 기습공격으로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져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내평지서 경찰관들의 끈질긴 항전으로 국군이 춘천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북한군의 서울 진격을 저지하여 춘천대첩의 초석이 되었다.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에서는 1950년 7월7일 중요 시설인 영월화력발전소를 사수하기 위해 북한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전경 8대대 제1중대장 김해수 경감 등 47명의 결사대를 편성하여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대장 김해수 경감은 대병력의 북한군과 싸워 승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사대원이 무사하기도 어렵다고 판단되었지만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1950년 7월8일 오후 2시경 영월화력발전소로 향하던 중 녹전리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자 선제공격으로 북한군 1진을 격퇴하고 백병전까지 벌여 북한군 73명을 사살하였으나 북한군의 대병력에 포위되어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김해수 경감이 적의 박격폭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는 등 결사대 24명이 전사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 조관묵 경감은 1950년 9월28일 서울과 춘천이 수복되자 대원 30여명과 북한군 10사단 소속 1개 연대 4,000여명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11월3일 패잔병들의 습격을 받아 부대가 통신이 두절되어 위험한 상황에서도 2,000여명의 양구 주민들을 후방으로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용전분투하였으나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6·25의 상흔은 아직까지 아물지 않고 있다. 부상을 입은 참전용사들은 불구의 몸으로 고생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조국에 바친 유족들의 아픔은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생사조차 모르는 이산가족들은 언제 성사될지도 모르는 상봉의 날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다시 이 땅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풍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국민 모두가 호국, 안보의식과 정신무장을 새로이 하여 북한의 도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