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화단상] 한 해를 보내며  

수필가 우승순

수필가 우승순

세밑이 다가온다. 연륜이 깊어갈수록 해가 바뀔 때마다 까닭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파고든다. 상실감 때문일까? 아니면 세월이 주는 자연현상일까? 이 세상에 늙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온갖 수식어로 나이를 포장해도 몸과 마음은 얄궂게 신호를 보낸다. 잘랄루딘 루미의 시구(詩句)처럼 불안도 인간이라는 여인숙에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찾아오는 별난 손님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더딘 세월을 조바심 낼 수 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급류처럼 빠르게 느껴질 때도 있고 깊은 강물처럼 멈춘 듯 흐르기도 한다. 과거가 늘어나고 미래가 줄어들수록 낭떠러지를 앞둔 계곡물처럼 빠르게 내달린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의 시간에 대해 본능적인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따로 약속한 시간이 없어도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 속의 시간을 확인하곤 한다. 어려서부터 촘촘하게 짜여 진 시간의 틀 속에서 “시간은 돈이다”, “시간을 아껴 써라”와 같은 말을 격언처럼 학습하며 살아 온 까닭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달려와 쏜살같이 사라지는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는 지나가고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면 현재는 있는 걸까?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된다. 시간의 직선 개념인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무한의 ‘지금’이 있을 뿐이다. 자연에는 시간 대신 ‘변화와 순환’이 있다. 꽃이 피고 낙엽지면 이듬해 새순이 돋는다. 태양도, 지구도, 인간도, 하루살이도 길고 짧음만 있을 뿐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우주에 영원불변인 물질은 없다. 시간의 과학적 의미는 엔트로피의 증가다.

TV에서 어떤 치매관련 보험 광고를 보면, 어린 시절 총명했던 모습에서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성공한 인생으로 살다가 은퇴 후 늙어서 집 앞에서 길도 잃고 ‘나’도 잃어간다. 이 짧은 타임머신을 경험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불과 150년 전,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지구촌의 그 모든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시간을 일 년을 단위로 보면 을사년에서 병오년으로 바뀌는 것이고, 십년을 단위로 보면 고희(古稀)를 지나는 길목에 있으며, 백년을 기준으로 보면 부모, 나, 자식의 3세대를 통과 중이다. 세월을 천년 단위로 보면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 할 뿐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한 호흡에도 천년이 있고 천년도 한 호흡인데 만년(萬年)인들 못 살겠는가.

뉘엿뉘엿 한 해가 저문다. 온갖 희망의 말잔치로 시작했지만 돌아보니 백년의 근심으로 살았다. 소설가 백영옥이 말했듯이 인생의 대부분은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으로 채워지는가 보다.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어디쯤으로 돌아가 간절히 다시 시작하고픈 ‘그때’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될 수도 있겠다. 새해엔 ‘지금의 나’를 힘껏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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