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3월 초의 어느 쌀쌀한 아침, 에티오피아 북부의 험준한 고원 지대에는 수천 명의 농부, 목동, 장인, 사제, 상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땅을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당시 근대화된 유럽 군대는 고요하고 자신만만하게 언덕을 가로질러 아두아(Adwa)라는 작은 마을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은 이미 분할되고 정복된 상태였습니다. 에티오피아 밖의 많은 이들은 이 상황을 ‘강자는 확장하고 약자는 굴복한다’는 역사의 전형적인 결말로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그 각본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메넬리크 2세(Menelik II) 황제와 타이투 베툴(Taytu Betul) 황후는 수년간 세계 정세를 읽고 지도와 조약을 연구하며 공통의 목표를 위해 여러 영토를 하나로 결집시켰습니다. 특히 날카로운 통찰력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를 가졌던 타이투 황후는 종속을 의미하는 그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월1일, 그 결의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전투는 격렬했고, 언덕은 먼지와 연기로 뒤덮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믿기지 않는 현실이 나타났습니다. 침략군이 무너진 것입니다. 전열은 붕괴되었고 병사들은 흩어져 퇴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국가가 유럽의 강대국을 압도적으로 격파하고,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두아의 승전보는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아두아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흑인들에게 ‘제국이 곧 운명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대륙 반대편에서 한국인들 역시 같은 세계적 흐름 속에서 다른 형태의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두아 전투 15년 후 한국은 국권을 침탈당했고, 언어와 문화는 억압 받았습니다. 당시 지배자들은 역사가 강자의 지배라는 단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국가의 혼은 강압적인 명령으로 파괴될 수 없음을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두아 전투와 3·1 운동은 서로 다른 대륙, 다른 깃발 아래서 탄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건은 하나의 심장박동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어떤 나라는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고, 어떤 나라는 복종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논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 후, 이 유대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바다를 건너와 싸웠습니다. 자신의 독립을 수호했던 이들이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힘을 보탰다는 사실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인연의 끈입니다.
아두아 전투 130주년이 된 오늘날, 전쟁터는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시장, 기술, 정보, 금융이 군대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이 기념일은 단순한 추모 그 이상이며, 현재 진행형인 과업입니다. 한국이 식민 지배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민의 역량과 기술, 결단력을 모아 다시 일어섰듯이, 에티오피아 역시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아두아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인천 그리고 그 너머의 한국 독자들에게 아두아는 먼 아프리카의 전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식민주의와 갈등을 딛고 민주주의와 번영으로 나아간 한국의 여정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오래전 아두아의 언덕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당대의 ‘당연시되던 운명’을 뒤엎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대륙과 세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먼 곳의 수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와 꿈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에 의해 매일 새롭게 쓰여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