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서울
“아가씬 어디가 아파서 왔어?”
환자복으로 막 갈아입고 났을 때였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한눈에도 병색이 짙어 보이는 퀭한 눈이 내 몸을 훑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노리끼리한 눈이 아무래도 황달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환갑이 조금 지났을까. 마치 만삭의 임산부처럼 그녀는 남산만한 배를 환자복 속에 힘겹게 감추고 있었다.
순간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에티오피아 난민이 떠올랐다. 앙상한 뼈에 배만 볼록한 몸. 파리가 득실거리는 음식을 손으로 먹던 허연 눈의 아이들. 저 볼록한 배엔 어쩌면 입으로 들어간 파리가 득실거리는 건 아닐까. 그때 머릿속을 맴돌던 각종 애벌레의 환상이 떠오르며 뱃속이 요동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나는 그만 침대에 울컥 토사물을 쏟고 말았다.
“이런, 어디가 많이 아픈 모양이네….”
병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친년아! 그러게 왜 수술은 한다고 해서 생병을 앓고 지랄이야!”
뒤늦게 병실로 들어선 엄마는 다짜고짜 버럭 욕부터 해댔다. 덩치에 맞지 않게 비위가 약한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였다. 엄마의 서슬에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종합병원이라는 데가 이런 곳일 줄이야. 하긴 웬만해선 병원 올 일 없는 내가 종합병원의 생리를 알았을 리 만무다. 그래도 다리가 삐거나 무릎에 무리가 갔을 때 다니던 의원에선 같은 종류의 환자들끼리 한 병실을 쓰게 했었다. 하지만 이 큰 병원에 나 하나 들어갈 곳이 없어 이렇게 중환자들만 모여 있는 병실에 들여보내다니. 임신도 아닌데 배가 남산만한 사람이 없질 않나, 콧속에 호수를 박고 있는 사람이 없질 않나. 어떤 병상에선 환자의 배에 구멍을 뚫고 오줌까지 받아내고 있었다.
“아주 송장들만 모아놨구나. 여기서 있다간 멀쩡한 사람도 죽어나가겠다.”
입원수속을 마친 엄마는 안 되겠다며 다른 병실을 알아보기 위해 나갔다. 하지만 돌아온 엄마는 잔뜩 짜증이 묻은 얼굴이었다.
나는 결국 간호사가 놔주는 주사를 맞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주사를 맞고 나니 속이 가라앉고 몰려들던 몸살기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가씨는 어디가 아파서 그래? 보기엔 아주 건강해 보이는구만.”
돌아보니 아까 그 부인이 다시 퀭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전히 남산만한 배를 안고서였다.
“어디가 아픈 거면 열불이나 안 나지요. 이 미친년이 글쎄 얼굴을 고친다내요.”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병실에 울렸다. 순간 흩어졌던 시선들이 다시 내 쪽으로 몰리는 걸 느꼈다.
“아니 어딜 수술을 한다고 그래?”
그녀의 표정은 무척 놀란 것 같았다. 아니 한심한 표정인지도 몰랐다.
““턱이요. 저게 복턱인데 그것도 모르고 손을 댄다니. 참….”
엄마는 거푸 손부채질을 해댔다. 병실의 모든 눈동자들은 이번엔 내 턱으로 모아졌다.
“아니 턱이 어때서 수술을….”
그녀의 노리끼리한 눈이 내 턱에 닿았다. 그리곤 곧 알만하다는 표정이 되고 있었다.
“옛날부터 주걱턱이 잘 사는 법인데 뭘 그러니….”
아이들의 놀림에 씩씩대며 가게 문을 연 내게 이쁜이 아줌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의 대통령 부인도 주걱턱이지 않았냐며 그녀는 잔뜩 골이 나 들어 온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하지만 내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내 턱은 단지 주걱턱으로 부르기엔 너무나 약한 느낌이었다. 삐죽이 나온 아래턱이 약간 앞으로 휘어있어 영락없이 끓는 곰탕을 풀 때 사용하는 국자모양이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내가 알기론 일가친척 어느 하나 이런 턱을 가진 사람이 없건만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턱만 이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건 턱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배국자. 어쩌면 허구 많은 이름 중에 국자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래도 야 그게 허투루 지은 이름이 아니다. 돈 주고 유명한 작명가한테 지은 이름이다.”
내가 따지고 들자 엄마는 오히려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아니 이름까지라면 백번 양보해 그냥 넘겨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돈 주고 지었다고 하고 얼굴이야 그렇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할 수도.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다름 아닌 내가 곰탕집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곰탕집 국자. 배국자.”
아이들은 음까지 넣어 노래를 부르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네 턱은 복턱이다. 우리가 이만큼 밥 먹고 사는 건 네 턱 때문이야.”
밖에 나가 내가 놀림을 받든 말든 엄마는 늘 내 턱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었다. 모처럼 방안에 들어앉아 숙제라도 좀 할라치면 엄마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다 손님 앞에 세우곤 했다.
“우리 복덩이에요.”
손님들은 내 얼굴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그리곤 거 참 희한하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손님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박장대소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손님들은 구경 한번 잘 했다는 듯 지갑에서 동전이나 지폐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꼭 한마디씩 덧붙이는 것이다.
“이 곰탕집은 딸한테 물려주면 되겠네. 딸이 더 잘할 걸 아마….”
머리 위에서 번개가 친 느낌이었다. 곰탕집을 물려받다니. 엄마처럼 평생 곰탕 끓는 솥 곁에서 늙어가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그건 내 인생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 생긴 턱에 돈 주고 지었다는 이름까지. 이 척척 들어맞는 삼박자에 자꾸 드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너 혹시 배구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어느 날 체육선생님이 내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키가 꽤 큰 편이었다. 키도 크고 발도 크고 손도 크고. 모든 게 아버지를 닮은 탓이라고 했다. 계집애가 발이 크면 팔자가 사나운 법인데. 엄마는 한숨을 섞어 말하곤 했다. 하지만 뭐든지 큰 덕분에 나는 단박에 체육선생님의 눈에 들었다.
그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배구를 하게 되면 학교에 남아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방과 후에 학교에 남는 게 많이 힘들 거라며 마음 좋은 선생님은 벌써부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만약 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와 이쁜이 아줌마 둘만 있는 가게는 늘 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곰탕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나이에 비해 덩치가 큰 덕에 나는 웬만한 점원 몫의 일을 거뜬히 해냈다. 이쁜이 아줌마는 그런 날 언제나 대견해 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한동안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엄명이라는 말에 예상대로 백기를 들고 배구부에 드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배구가 좋았다. 새로 맞춘 유니폼도 좋았고 공이 흰색인 것도 좋았다. 나는 중앙 센터에 포지션이 주어졌다. 웬만한 6학년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상대편 공격수가 때린 공을 높이 점프해 블로킹을 할 때면 온몸에 날아갈 것 같은 희열이 느껴지곤 했다. 나는 내가 때린 공이 상대편 코트에 통렬히 꽂히는 기쁨에 빠져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내 점프 높이의 짜릿함도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물론 힘이 들 때도 있었다. 특히 공을 얼굴에 맞는 날엔 코피를 쏟거나 얼굴이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힘든 건 잠시 뿐이었다. 나는 공이 얼굴에 맞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만약 공이 날아와 튀어나온 턱에 맞아 납작턱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인가 은근슬쩍 날아오는 공에 얼굴을 대 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공은 턱이 아닌 별로 높지도 않은 코를 때리며 줄줄 코피를 쏟게 만들고 말 뿐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역시 중앙센터였다.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키가 어느 순간 별로 커 보이지 않는 것은 문제였다. 하지만 그래도 소년체전에 나가 동메달까지 딴 팀의 센터 공격수를 중학교라고 홀대할 리 없었다.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른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랐다. 가장 작은 세터마저도 팀의 센터 공격수인 나의 키에 육박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 지겨운 곰탕을 질리도록 먹어댔지만 자라지 않는 키를 어쩌진 못했다. 키가 작은 중앙공격수는 상대편에게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친 공은 더 이상 코트에 통렬히 꽂히지 않았다. 더 이상 블로킹도 할 수 없었다. 상대편 공격수가 친 공은 번번이 내 블로킹을 통과해 우리 팀의 코트를 강타했다. 그런 내게 더 이상 코트에 나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후보로 전락한 난 벤치에 앉아 박수를 치고 파이팅을 외치며 다른 선수들을 독려할 뿐이었다.
“혹시 세터를 해 볼 생각은 없니?”
내게 세터를 제안한 사람은 새로 부임한 코치선생님이었다. 실업팀에서도 뛰었다는 그는 발목 부상으로 화려하지 않은 선수생활을 접고 성적이 나쁜 중학교의 코치로 부임한 신출내기였다.
세터로의 전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주전은 아니었지만 주전세터가 컨디션이 안 좋거나 작전상 코트 밖으로 나와 있을 때면 나는 잠깐이지만 코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