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거어! 니가 지금
날 데리고 쇼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내가 니 언닐 내다버렸다고”
“글쎄, 가 본 지 멫 십 년 지나서……. 나도 일루 오면서 그쪽하곤 발 안 끊었나? 가끔 연락되든 기도 끊겼다. 다아 늙어 뿌릿겠제.”
“거기 떠나올 땐 기억나요. 여섯 살 되던 설날이었는데 아버지가 이제부터 가는 집에 새엄마 있다, 가서 잘해야 한다, 그랬어요. 근데 언닌 도통 기억에 없어요. 그때부터 언니랑 헤어진 건가요?”
“야가, 씰데없이. 니 요즘 들어 와 자꾸 니 언니 얘긴 꺼내 가만 있넌 사람 속을 디베 놓나? 앙?”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듯 노인은 흥분했다. 노인이 감추려고 할수록 당신은 들춰내려고 했다.
문득 사과를 깎는 것이 시간의 껍질을 돌려 깎는 것 같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러나 깎아낼수록 드러나는 기억들이 고통일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엉겁결에 당신은 사과 깎던 손을 멈춘다. 입을 크게 벌려 덥석 사과 한 입을 베어 문다. 가슴 한 귀퉁이가 허전해진다. 손 가득 풀풀 날리는 사과 냄새를 코끝에 갖다댄다. 사과냄새 너머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화장품 냄새가 밴 사과를 먹었던 기억. 엄마랑 살래? 아버지랑 살래? 사과에 밴 진한 엄마 화장품 냄새가 싫어서 아버지랑 살겠다고 대답했나? 언니는……, 당신은 기억 속에서 언니를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소용없다. 아니 상황 자체가 또렷치 않다. 언니랑 함께 살았을 때 기억으로 남아있는 두서너 개의 기억들이 모두 그렇다. 항아리에 쌀 떨어지는 소리도 그랬다. 잠결에 듣곤 했는데도 쏴아 소리에 대한 기억은 났다. 땅바닥을 패며 쏟아지는 오줌소리 같던 쌀 부딪는 소리와, 숨죽이고 듣던 두려움의 느낌만은 선명하다. 그것이 엄마가 쌀독에 쌀을 쏟아 붓는 소리라는 것은 당신이 자라면서 눈치껏 챙긴 내용이다. 그렇게 쌀독을 채워놓고는 며칠씩 집을 비우곤 했으리라. 당신은 사과냄새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사과를 밀어내며 일어섰으나 금세 소리는 끊어진다. 혹시 노인에게 문제가 생겨서 전화가 온 것인지, 불안해진다. 노인의 방문을 벌컥 열어본다. 방은 썰렁하게 비어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두 눈에 힘을 주며 언성을 높이던 노인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늘 일을 벌여놓고도 노인은 가지런히 누인 두 발만 이불 밖으로 내놓은 자세로 나는 모른다고 발뺌을 했다. 지금 화장실 청소했어요, 아버지이! 팬티도 젖지 않았냐고 확성기를 댄 듯 목소리를 높이면 그제야, 청소했나? 어제 낮에 변비약 묵었는데 오늘 변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냐는 식이었다.
당신은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한다. 비누를 잡으려고 했지만 몇 번 비누를 놓친다.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희끗희끗 드러나는 흰 머리카락을 들여다본다. 문득 거울에 비친 당신 얼굴이 노인의 얼굴을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 아버지랑 붕어빵이던데, 뭘. 황의 말이었다. 노인이 집으로 들어올 때 이삿짐을 돕느라고 황은 노인을 보았다. 당신은 황의 말을 건성으로 흘렸지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그의 말은 적중률이 높아갔다. 당신은 거울 속 얼굴을 향해 바가지 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황에게 전화를 건다.
당신은 황을 위해 삼겹살과 소주를 미리 준비했다. 웬일이냐고 놀라서 소리치던 황은 노인넨? 하고 묻는다. 노인네…… 지웠어. 당신은 은밀하게 대답한다. 황은 금방 당신 말을 알아듣는다. 말을 해도, 어떻게! 핀잔을 주더니 어떻게 요양원 가신 거야? 라고 연이어 묻는다. 황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황은 당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업무과 일을 보고 있다. 당신은 황과 잠자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와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술이 취했거나 병이 났거나 우울하거나 등의 소소한 일상을 챙겨줄 관계는 되어서 병원 사람들은 둘 사이를 연인으로 오해했다. 그래도 당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이제 그만 말년 연애 끝내자고 가끔 황이 취중에 농담을 했지만 그 말은 실제 농담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이 자신을 만나지도 않을 거라는 걸 현명한 황은 잘 알았다.
집으로 초대를 받은 건 처음이어선지 황은 스무 살 청년처럼 수줍어하며 프리지아 꽃을 내민다. 프리지아의 진한 노란 색이 순결해 보여서 당신은 왠지 섬뜩하다.
“황사가 심해. 목구멍에 달라붙은 황사를 삼겹살 기름으로 씻어 낸다는 말들이 괜히 떠도는 헛소리가 아니야.”
당신은 엉뚱한 말로 꽃을 받아든 화답을 한다. 꽃을 노인 방에 갖다 놓는다. 황은 목을 빼고 빈방을 들여다본다. 당신은 황의 얼굴을 밀어내고 문을 닫는다.
상추 한 장을 손바닥 위에 펼친 후 지글지글 기름진 삼겹살을 얹고 그 위에 쌈장과 고추 그리고 마늘을 올려 상추로 감싸면서 힘껏 입을 벌려 붉은 혓바닥 위로 그 푸릇한 쌈을 밀어 넣는 일련의 동작들을 반복하며 황은 가끔 당신을 향해 웃는다.
“아버지랑 이렇게 둘이 앉아서 저녁을 먹었겠네?”
황이 묻는다. 경음악 선율이 흐르는 4인용 식탁에 노인과 기역자로 앉아있는 당신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보인다. 상차림이 끝나면 당신은 식기 건조기 아래 옵션으로 달린 라디오를 틀어 FM 세상의 음악에 주파수를 맞췄다. 야야, 시끄럽다. 노인의 말을 무시하며 당신과 노인은 세상의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을 먹었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버님 요양원 보낸 거, 잘했어. 노인도 첨엔 불편해도 곧 익숙해질 거고.”
황의 말에 당신은 기억 속에서 황망히 빠져나오며 적어도 서로 얼굴 맞대고 미워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 뉴스 봤어? 치매 모친 데리고 오십 대 딸이 지하철로 떨어진 거. 그 딸도 심각한 우울증이었대. 남 얘기가 아니야.”
“나라도 내 늙마를 짐 지우기 싫어서 뛰어내릴 거야.”
“그거 보니깐 겁나데. 우리도 늙어간다는 사실이 겁나더라고.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벌써 이러면 어떡하나? 사십 나일 헛먹었어.”
“사십대는 늙지도 젊지도 않는 나이래. 당신은 아직 마흔 살 총각이잖아.”
“당신은? 육십 대 할머니처럼 말하고 있는 거, 알아?”
황이 웃는다. 당신은 소주를 들이켜며 황의 웃음을 피한다. 당신의 볼이 술기운으로 발그레지자 황은 술꽃이 피었다며 당신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이 당신의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 속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내버려 둔다. 오늘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의 손길이 필요했다. 걸치고 있던 검은 세타의 단추를 열고 황은 이내 당신의 가슴에 코와 입을 묻는다. 문득 빈방에서 훔쳐보는 노인의 시선이 느껴져서 당신은 오싹해진다. 그러나 단단히 닫힌 방문을 떠올리며 안심한다.
황의 손길에 당신은 온 몸이 간지럽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결에 당신의 몸은 항아리에 넘치는 물처럼 출렁거린다. 성급한 황의 욕망은 곧 쏟아져 내리리라. 땀에 젖은 손길로 황이 당신의 손을 잡아준다. 당신이 기다렸던 순간이다. 그리고 금방 황은 항아리 바닥에 가라앉는 먼지처럼 고요해진다.
“감자탕을 끓였어. 저번 토요일, 당신 생일이었잖아. 기억나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노인 때문에 내가 중간에 일어섰을 때, 당신은 화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병째 술을 마셨어.”
황과의 잠자리가 끝나면 늘 그랬듯 당신은 천천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얘기를 시작한다. 문 밖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듯한 당신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어둠처럼 스민다.
그날, 식탁에 감자탕 그릇을 올리자마자 노인은 무섭게 들쭉날쭉한 등뼈 속을 한 치 빈틈도 남기지 않고 핥아먹었다. 바쁘게 오물대는 긴 인중, 돼지 뼈에 붙은 살에 가 있는 집중된 노인의 시선을 바라보며 당신은 입맛이 당기지 않아 탕 속의 시래기들만 휘휘 저었다. 노인 앞에 뼈들이 수북한 더미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신은 술까지 건네며 노인의 비위를 맞추려 애를 썼다. 어떻게든 오늘은 언니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맛있네, 카하. 소리를 내며 노인은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다시 술잔을 채우며 당신은 노인에게 어떤 질문부터 할 것인지를 가늠했다. 사실 당신은 그 전날 밤부터 고민하며 노인에게 질문할 내용의 목록까지 준비했다.
“아버지, 제가 어릴 때 엄마가 무슨 병이 있었나요?”
“씰데없이! 병은 무슨! 술병이제. 내가 밖으로 나돌아서 그랬다고 니 엄만 날 탓했지만 그거 술병 고쳐보려고 생고생했다. 거다 바람까지 피워 자식새끼 거지로 내몰았지. 내가 일 때문이 타지에 있는 동안 니 엄마가 시장 통 포목점 주인 놈하고 바람이 난기라. 그걸 우예 데리고 살겠나.”
술술 말을 뱉어내는 노인을 보며 역시 감자탕을 끓이기 잘했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언니에게 전화 왔었다는 얘기를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고는 얼른 고기 뼈를 한 국자 퍼주며 술도 한잔 넘치도록 따랐다.
“그 술지랄에 니가 엄청 맞았다. 술만 먹으면 정신을 놨으니까. 니 에미가 널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오줌 대야 엎었다고. 그년이 미쳤지. 오줌에 세수하면 얼굴 하얘지고 곱고 뭐, 그래싸서 그랬단 얘길 들었다.”
“예에, 악몽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히히, 그래도 아버지랑 옛날 얘기하니까 재밌네. 진짜 연속극이잖아. 그죠?”
당신은 데데거리는 말들을 쓸어 담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매를 피하려고 언니가 니를 노상 엎어 키웠다. 가는 크다고 덜 맞았지만.”
“언니라고 뭐 달랐겠어요? 그런데 언닌 왜 안 데려왔어요?”
당신의 질문에 노인은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노인은 지금 무엇으로 고통스러운 걸까? 노인에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