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난리통을 겪더라도 “도대체 거기, 무슨 일 있었는가?”라고 순박하게 생긴 두 눈망울을 껌뻑이며, 태연하게 말할수 있는 곳.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도 난리를 겪지 않았다는 홍천군 내면 율전2리 살둔마을.
‘사람이 기대어 살만한 둔덕’이란 뜻의 살둔.‘삶둔’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생둔(生屯)’이라고도 한다.
조선중기‘정감록’에서도 전국의 피난처 일곱 군데를 꼽았는데, 그 중 한곳으로 꼽았을 정도다.
백두대간의 준령에 자리잡은 살둔은 마을 전체가 병풍을 쳐놓은듯 1,000m가 넘는 고봉들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두메산골이다.
국내의 오지 여행가들에게는 1980년대까지만해도 ‘한국의 티베트’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바로 그곳에서 나름의 삶을 영위해가는 이들의 꿈과 희망은 무엇일까.
살둔 사람들을 만났다.
■김남성(65)·이순태(65)부부는 5년전 이곳에 정착했다.
오랫동안 살던 경기도 평택시를 떠나 이곳 오지까지 찾아 들었다.
김씨는 “개인사업을 하다 은퇴하면 꼭 세속과 떨어진 나만의 곳에서 살기를 바랐는데, 바로 그곳이 살둔이었다”고 했다.
그들 부부는 밭 모양이 반달을 닮았다해서 붙인 소규모의 ‘반달밭 민텔’을 운영중이다.
고공순(여·73)씨도 건축업을 하는 아들 장무석(47)씨와 비슷한 시기, 서울을 떠나 자리를 잡았다.
이들 가족은 마을에서 대가족으로 통한다.
아들과 며느리 남옥지(45)씨에 손주 3명이 나란히 5살과 중1, 고1을 다니고 있다.
고씨는 “아침저녁 자동차로 20분걸리는 면소재지 학교까지 등하교시키는게 수고스럽지만, 그래도 자연에서 얻는게 많다”고 했다.
하지만 고입과 대입을 앞둔 자녀들을 생각하면, 마냥 산골 오지가 태평할수만은 없을 터였다.
아들 내외와 아이들은 겨울방학, 서울에서 1달간 사설학원에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고 있다고 했다.
“자식들과 왜 함께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고씨는“강아지가 2개월전에 새끼를 낳았는데, 아직 얘네들이 젖을 떼지 못해…(돌봐줘야 한다)”라는 예기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살둔 마을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김기남(64)·이용숙(62)씨 부부는 마을의 역사에 훤한 그야말로 산증인이다.
이들은 50년대부터 전형적인 화전민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을 억척스럽게 일궈 밭을 만들고, 감자와 고추 콩 쌈채 등 각종 농산물을 길러 5남매를 키워낸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마을의 영원한 총각으로 불리는 김춘길(61)씨는 30여년전 토종벌로 전국을 떠돌다 살둔에 정착했다.
그는 ‘살둔에서 생산된 피나무 엄나무 꿀은 전국 최고의 맛’이라는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여기에 토박이 이면서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0년전 귀향한 전마을이장 최흥순(42)·박순관(40)씨 부부는 부지런함으로 똘똘 뭉친 신농촌의 주역들이다.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 농촌체험 캠프와 래프팅 등 마을의 새로운 활력은 물론 고로쇠나무 수액과 메주 등 마을 특산품 개발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새롭게 마을 일을 맡은 이동철(43)이장과 마을 공부방의 사무장 역할을 하는 이태호(38)씨도 마을의 일꾼이다.
마을 주민들의 걱정은 여태껏 이들이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어디 참한 색싯감 없느냐는 얘기는 그래서 절로 나온다.
이상열(76)·김재임(76)씨 부부는 소싯적에 제천과 부산 김해 등을 떠돌다, 50년대에 살둔에 정착한뒤 3남매를 올곧게 키워냈다.
자녀들이 자주 찾아뵙느냐는 질문에 “부산에서 강원도, 더욱이 이 오지를 올라치면 종일인데, 오겠다는 것도 말려야할 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살둔 마을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 산장 때문이다.
윤보선 전대통령과 친·인척 지간인 산악인 고(故) 윤두선씨가 백담산장을 내려와 1982년 지은 산장이 바로 ‘살둔산장’이다.
월정사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도목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지은 집이란다.
한 출판사에서 선정한 ‘한국인이 살고 싶은 100대집’에 포함되면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산장지기는 3∼4차례 바뀌었지만 지금은 원래 토지 소유주의 집안인 차찬호(38)씨가 맡아 운영 중이다.
얼마전 결혼한 그는 부인이 처갓집인 대전에서 산후조리중이어서 잠시 집을 비워놓았다.
2층 다락방의 이름은 ‘바람을 베고 잔다’는 뜻의 ‘침풍루’다.
운치있는 이름이다.
또 멀찌감치 떨어진 화장실 이름은 내린천에서 따온 ‘내린정’이다.
이름 그대로 바람을 베고 자는 다락방인데다 난방이 안되니 겨울에는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야한다.
겨울밤의 초롱초롱한 별무리를 보는 즐거움은 그런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게 한다.
산장 바로앞 내린천 상류에 소(沼)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재밌다.
‘호랑소’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소 위의 절벽에서 호랑이가 앉아 낮잠을 자다 그만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고보니 절벽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게 가파르고 암석 모양도 괴이하게 보인다.
또 마을에는 김동학(37)씨의 아버지를 거쳐 할아버지때 지은 귀틀집이 아직 그런대로 원형을 갖추고 있는데, 지금은 집안 창고로 쓰인다.
최근에는 겨울채비에 패놓은 큼지막한 장작더미가 집 외벽을 둘러싸고 있다.
김씨 개인의 부지런함과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야만 하는 살둔이 만들어낸 겨울 풍경이다.
홍천=류재일기자 cool@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