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 그대로 시간이 멈춤 곳, 고성 왕곡마을!’
고성 송지호 인근에 자리 잡은 왕곡마을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북방식(함경도식) 전통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에 위치한 왕곡마을의 역사는 고려 말기부터 700여년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왕곡마을에 현존하는 기와집들은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안방·사랑방·부엌·마루 등이 한 채에 딸려 있는 가옥)의 형태로 긴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가옥 구조를 갖고 있다.
왕곡마을은 2000년 1월7일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돼 안동 하회마을, 제주 성읍마을, 순천 낙안읍성마을, 경주 양동마을, 아산 외암마을 등 5개 마을과 함께 국가가 문화재로 지정한 민속마을이다.
이에 앞서 1988년 8월18일에는 문화공보부 고시 제736호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1호’로 지정되는 등 옛날 조상들의 삶의 숨결과 지혜를 고스란히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 과거 - 강릉 함씨·최씨 집성촌 형성
왕곡마을은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등의 집성촌으로 고려시대 말엽 두문동 72인 중 한 분인 홍문박사 함부열(咸傅烈)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해 왕곡마을로 은거하면서 형성됐다.
두벽산, 골무산, 호근산, 순방산, 밧도산 등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지명도 오봉리(五峯里)이다.
전통마을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산과 호수로 막혀 있어 고성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였다.
마을 상시관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최당훈(67)씨는 “마을 앞은 송지호가 가로막고 있고 바닷가로 유일하게 통하는 길(한고개)은 소가 쌀 3가마를 싣고 겨우 넘을 정도로 높은 고개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같은 여건이 오히려 전통 가옥을 수백년간 보존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왕곡마을은 송지호에서 바라보면 배를 밀어넣은 방주형인 탓에 길지로 소문이 나 있다.
함병식(70)씨는 “마을이 물에 떠 있는 배 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우리 마을에는 우물이 없다”며 “수백년간 전란과 화마가 발생해도 피해가 없을 정도로 길지 중의 길지이다”고 귀띔했다.
실제 6·25전쟁 당시 동해안에서 적 함포사격이 있었지만 마을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비행기 폭격으로 포탄 3발이 마을 인근인 골무산에 떨어졌지만 모두 불발탄이 된 점도 명당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특히 1996년과 2000년 고성 산불이 발생해 인근 마을이 초토화됐지만 왕곡마을은 화마가 피해가기도 했다.
마을에서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함영자(여·58)씨는 “주민 모두가 마을의 깊은 전통과 의미에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다”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 옛것의 진정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왕곡마을”이라고 설명했다.
>> 현재 - 전통문화 살려 소득과 연계중
왕곡마을은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마을 보존지구로, 2000년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각각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현재 마을에는 기와집 28동과 초가집 15동이 전통 가옥으로 복원되거나 보수됐고 앞으로 5동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전통 가옥 대부분이 19세기를 전후로 건립된 북방식 전통가옥이며 ‘ㄱ’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남부지방의 가옥들은 마루가 노출돼 있는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이 한 건물 내에 나란히 배치된 겹집 형태로, 부엌에 마구간을 덧붙여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했다.
함석원 (사)왕곡마을보존회사무국장은 “왕곡마을에는 집집마다 굴뚝에 항아리를 얹어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해 놓았다”며 “이 같은 조상의 삶의 지혜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다.
고성군은 문화재청 지원사업으로 1989년부터 10년간 69억원을 들여 전통가옥 보수를 실시했고 2003년부터 10년간 230억원을 들여 마을 원형보존 및 관광 편의시설 확충 사업을 벌이고 있다.
왕곡마을 주민들도 2004년 사단법인 왕곡마을보존회를 발족하며 전통 복원에 힘쓰고 있다.
2004년부터는 복권사업기금을 지원받아 ‘왕곡마을 전통민속체험행사’를 열고 있다.
최의성(69)씨는 “축제가 열리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맷돌체험과 짚신 만들기, 새끼꼬기, 감자캐기, 떡메치기, 미꾸라지 잡기, 벼 탈곡, 도리깨질, 봉숭아 물들이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복권판매 부진 등을 이유로 지난해부터 기금 지원을 전면 중단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군은 고육책으로 올해 군비 5,000만원과 마을 자체기금 5,000만원 등을 합쳐 해당 축제를 다시 열 계획이지만 국비 지원은 여전히 절실하다.
함익영(69)(사)고성왕곡마을보존회장은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는 전통가옥 원형복원과 마을길 포장, 주차장 건립 등 기반시설 조성사업은 마무리 단계”라며 “이제는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주민들의 소득을 연계할 수 있는 알맹이를 채워놓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 미래 - 민속마을의 표본으로 성장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왕곡마을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이 추진되고 있다.
고성군과 (사)왕곡마을보존회는 기반시설 정비 사업이 마무리되는 올 하반기부터 상설 전통문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첫 번째 단계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인 만큼 입장료를 징수해 마을 운영과 주민 소득원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이미 안동 하회마을을 비롯해 제주 성읍마을과 순천 낙안읍성마을 등 전통 민속마을이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입장료 징수를 위해 문화재청 지원을 통해 마을내에 향토 유물 등을 전시할 수 있는 민속사료관도 건립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 전통문화 체험프로그램 상설화이다.
현재 문화재청이 매입한 전통가옥 9동을 숙박 시설로 활용하고 군유지에 작물을 재배해 관광객들이 직접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5월 중 마을 입구에 승용차 70여 대와 대형버스 15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조성되고 연내 특화된 홈페이지도 구축될 예정이다.
최현철(71)씨는 “마을 주민 중 65세 이상이 전체의 75%를 차지할 정도여서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취지를 살리고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젊은층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며 “특히 스쳐가는 관광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주민들이 소득을 올리면서 생활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함석주(51)오봉1리장은 “올 하반기 주차장과 민박을 할 수 있는 기반시설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전통문화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이를 활성화할 계획”이라며 “왕곡마을이 민속 마을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마을 주민 모두가 합심할 것”이라고 했다. 고성=최성식기자 choigo75@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