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주문진의 여름은 바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래된 냄새가 배어 있던 하천 하나가, 이름도 잊혀가던 신리천이 이젠 은빛 물살을 되찾고 있다. 그 뒤엔 팔순을 넘긴 어르신들의 손길이 있다. 주문진노인대학 소속 어르신들이 8년째 ‘흙공’을 빚으며 하천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이다. 관공서도 못 한 일을, 손주뻘 되는 이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일을 그들은 묵묵히 해냈다. 낡은 골절처럼 방치되던 신리천은 이젠 철새가 찾아오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다. ▼‘노익장’이라는 단어는 뻔한 수사가 됐지만, 이곳 어르신들의 움직임은 그 이상의 울림이다. 소진되거나 잊히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 공자도 논어에서 “나이 들어도 뜻을 잃지 않으면 늙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 어르신들은 뜻을 넘어서 결과를 만들었다. 1970년대 수산물 가공공장이 남긴 검은 폐수가 덮어버린 신리천을 복원하는 일이 설마 가능하겠냐던 회의 속에서 그들은 몸을 먼저 던졌다. 흙 한 덩이, 물 한 바가지가 다시 흐르게 하는 데는 정치도,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 다만 끈기와 정성이 있었을 뿐이다. ▼‘흙공’은 과학이지만 이것을 만드는 과정은 노동이자 기도다. 흙과 미생물, 석회가루를 개어 손으로 뭉치는 그 시간은 하천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살린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구겨졌던 자존감을 다시 펴는 시간. 어르신들이 매달 두세 번씩 꾸준히 신리천을 찾고, 황토를 만지며 자연을 되살리는 장면은 요즘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지속성의 상징이다. 수돗물보다 빠른 여론, 콘텐츠보다 짧은 관심 속에서 이들은 ‘지속’이라는 가장 오래된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뒤끝을 정리하는 건 결국 어르신들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강변, 오염된 물줄기를 되돌리는 데는 욕망으로 물든 세태가 아니라, 책임감을 되새긴 노년의 손이 필요했다. 신리천의 기적은 흙공보다도 그 안에 담긴 세월과 사람의 이야기 덕이다. 누가 노인을 ‘복지의 대상’이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