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2013 만해축전 전국고교생 백일장]문화부장관상(축전상)-문

정혜원(설월여고 3년)

언니가 끓이는 캐모마일차 냄새가 난다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콧노래가 뒤따른다

나는 몸을 기댄 채 진한 찻잎 냄새를 들이마신다

찻잎 우려내는 냄새는 집안 구석구석 퍼진다

언니가 끓이는 캐모마일차 냄새가 난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콧노래가 뒤따른다. 나는 문제집을 덮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진한 찻잎 냄새를 들이마신다. 텅 빈 문가를 넘어, 찻잎 우려내는 냄새는 집안 구석구석 퍼진다. 무른 복숭아 과육 같은 햇볕이 언니가 있는 부엌 깊숙이까지 손을 뻗는다.

똑똑.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언니를 내려다본다.

우리 집에는 문이 없다. 퇴근하던 언니를 덮친 음주운전자는 언니의 두 다리를 비틀어놓았다. 긴 재활치료 끝에 퇴원하던 날, 아빠는 집안의 문을 모두 떼어냈다. 아래층의 항의 때문에 언니는 집안에선 휠체어를 탈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쉽게 닿는 문고리가 언니에게 너무 높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나는 내 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이 영 어색했다. 긴 천을 구해 커튼처럼 달아보기도 했지만 새어나가는 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집에만 있게 된 후부터 언니는 내게 부쩍 관심이 늘었다. 가끔 내가 없을 때 방에 들어와 공책이며 연습장 따위를 들추어보기도 하는 듯했다. 친구와 통화라도 할라치면 언니가 밖에서 엿듣고 있는 것 같아 베란다에까지 나가야 했다. 나는 휑한 문가를 마음대로 지나다니는 언니의 허물없음이 못마땅했다. 초등학생 때 나란히 앉은 짝꿍끼리 그랬던 것처럼 금이라도 그어두고 싶었다.

언니는 퇴원 준비를 할 무렵부터 찻잎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난데없이 다도에 생각이 가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곧 방 안까지 풍겨오는 냄새만 맡고도 차 종류를 대강 알아맞힐 정도가 되었다. 언니는 직접 끓인 차를 내게 시험 삼아 맛보이기 위해 분주히 내 방과 부엌을 오갔다.

하루는 언니가 끓이고 남은 찻잎을 버린다며 검은 비닐봉지를 찾았다. 비닐봉지는 다용도실에 있었고, 다용도실 문은 아직 남아있었다. 모레가 시험이라, 나는 언니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한참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새끼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미약하고도 끈질기게 날 부르는 소리에 나는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성숙한 어른의 몸뚱아리에 어린아이의 다리를 끼워넣은 것처럼 아귀가 맞지 않은 언니는, 한 뼘 위에 있는 문고리를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문고리를 돌리며 무심코 내뱉었다.

“아씨, 귀찮게…….”

그때, 나를 돌아보는 언니의 얼굴을 보고, 나는 언니의 마음속에 있던 단단하고 견고한 철문이 꾹 닫힌 것을 느꼈다.

그 이후,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마다 언니의 표정을 살폈다. 알게 모르게 언니를 툭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말들이 오갈 때마다, 언니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나는 우리들 사이에선 쉽게 넘나드는 말도 언니에겐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다소 눈치 없어 보일 정도로 활짝 마음을 열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언니는 마음 속 문을 살짝만 열어놓은 채 모든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돋친 가시, 늘상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들까지도.

방에 들어온 언니는 손을 한껏 뻗어 책상 위에 찻잔을 올려놓는다. 품에는 이번에 새로 샀다던 찻잎 통들을 든 채다. 언니는 내게 손짓을 하곤 방바닥에 찻잎들을 한 줌씩 쥐어 둥글게 늘어놓는다. 바싹 말려 물기 하나 없는데도, 찻잎에는 아직 불그스름하고 누르스름한 색이 남아있다.

“이것 봐. 자세히 보면 여기에 일곱 가지 색이 다 있다. 이거 다 넣고 끓이면 무지개 향이 날 것 같지 않아?”

언니는 진녹색의 찻잎을 들어 내게 내민다. 내가 얼결에 그것을 받아먹고 쓴맛에 눈살을 찌푸리자, 언니는 한바탕 웃음을 쏟아낸다. 오랫동안 어금니 안쪽에 묵혀두었던 것을 와락 쏟아내는지 웃음은 오랫동안 이어진다.

나는 언니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채로 언니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댄다.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나는 언니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입으로 똑똑, 노크 소리를 낸다.

언니도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활짝 열린 언니의 품에서 쌉싸래한 캐모마일차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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